정치 국제

폴란드 ‘카틴숲 비극’에 3번 울다

물곰탱이 2010. 4. 12. 21:47



레흐 카친스키(60) 폴란드 대통령 일행을 태운 전용기가 10일(현지시각) 카틴숲 학살 70돌 추모식을 위해 인근 스몰렌스크 공군비행장에 착륙을 시도하던 중 추락해 대표단 88명을 포함해 96명이 모두 숨졌다는 비보가 전해진 직후부터 바르샤바 중심가의 대통령궁 앞은 수천명의 애도 인파가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내려놓은 추모 촛불과 꽃들로 뒤덮였다. 11일 사고현장에서 수습된 카친스키의 유해는 긴급 공수돼 대통령궁에 임시안치됐다. 바르샤바/AP 연합뉴스


폴란드 ‘카틴숲 비극’에 3번 울다


1940년 소련, ‘카틴숲’서 폴란드인 대학살
1943년 학살추궁 정부수반 비행기 추락사
2010년 추모행사 가는 길에 대통령 사망


폴란드가 70년 전 카틴숲의 망령에 또한번 울었다.

 

레흐 카친스키(60) 폴란드 대통령 일행을 태운 전용기가 10일(현지시각) 카틴숲 학살 70돌 추모식을 위해 인근 스몰렌스크 공군비행장에 착륙을 시도하던 중 추락해 대표단 88명을 포함해 96명이 모두 숨졌다. 공교롭게도 카틴숲 학살현장 인근에서 발생한 또다른 국가적 참사에 폴란드인들은 비통한 심정을 가누지 못했다.

 

현장에서 수습된 카친스키 대통령의 유해는 사고 발생 하루만인 11일 특별수송기 편으로 바르샤바로 공수돼 대통령궁에 임시 안치됐다. 장례 일자와 절차 등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공항에서 바르샤바 도심의 대통령궁에 이르는 도로변에는 수십만명의 바르샤바 시민들이 도열해 운구 행렬을 지켜봤다. 폴란드 정부는 1주일간 애도주간을 선포하고, 11일 정오를 기해 교회의 종과 사이렌이 울리는 가운데 2분동안 전국적인 묵념 의식을 거행했다.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전 대통령은 “저주받은 곳에서 벌어진 끔찍한 상징적 사건”이라며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믿기지 않는 비극”이라고 말했다.

 

카틴숲 학살은 1940년 4월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소련의 비밀경찰들이 1년 전 독-소 불가침조약 직후 폴란드를 침공해 포로로 잡은 폴란드군 장교와 지식인 등 2만2000여명을 집단학살해 암매장한 사건이다.

 

이번 참사를 접한 폴란드인들은 1943년 폴란드 망명정부의 수반인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장군이 영국군에 참가한 폴란드군을 격려하고 돌아오다 지브롤터해협에서 비행기 추락사한 의문의 사건을 떠올렸다. 당시 사고는 카틴숲 학살현장이 발견된 지 석달 만에 발생했다. 시코르스키는 당시 소련군의 책임을 추궁했지만, 스탈린은 이를 극구 부인했다. 영국은 시코르스키의 죽음이 단순 사고사라고 했지만, 폴란드인들은 영국과 러시아가 배후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카틴 대학살의 망령은 이번 사고에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러시아는 지난 7일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참석해 카틴숲에서 열린 공식 추모식에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를 초청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평소 반러·친미적인 카친스키 대통령은 초청하지 않았다. 카친스키는 이날 별도의 추모행사를 강행하려고 학살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카틴숲으로 가던 길이었다. 폴란드인들은 옛소련은 물론이고 러시아 정부가 그동안 카틴 대학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이 없다는 점에 분개한다. 국가 지도부를 잃은 두차례 비행기 추락사건이 카틴 대학살과 관련된 역사적 우연에 폴란드인들의 슬픔은 더했다. 러시아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깊은 애도를 표하며 푸틴 총리를 사고조사위원장으로 임명해 현장에 급파하는 등 비상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러시아도 12일을 애도일로 선포했다.

 

폴란드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해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잦은 침공과 지배에 대한 역사적 구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참사를 계기로 두 나라가 역사적 구원에 새로운 악연을 덧붙일지, 아니면 새로운 양국관계로 재출발하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자국에서 사고가 일어나 입장이 난처해진 러시아도 정부 차원에서 사태 수습에 나섰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이날 사고 직후 애도를 표명하고 이번 사고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약속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사고 발생 직후 푸틴 총리를 사고 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으며, 세르게이 쇼이구 비상대책부 장관을 현지로 급파했다. /AP 연합


1940년 '카틴 숲 학살 사건'은


"다시는 독립국 못만들게 만들어주마"
소련, 폴란드 엘리트 2만2000명 처형


"카틴의 흙은 폴란드인의 피를 바라는 것인가."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추락한 직후 폴란드 국제관계연구소 슬라오미르 데브스키(Debski)는 AP통신에 이렇게 통탄했다. 70년 전인 1940년 4월, 구소련 스탈린(Stalin) 정권에 의한 폴란드 지도층 2만2000여명의 처형을 가리키는 '카틴(Katyn) 숲의 학살'은 러시아와 폴란드의 오랜 악연 중에서도 가장 처참한 사건으로 꼽힌다.

스탈린의 승인 아래, KGB 전신인 소련 비밀경찰 내부인민위원부(NKVD)에 의해 행해진 학살은 1941년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이 1943년 4월 러시아 남부 스몰렌스크의 카틴 숲에서 머리 뒤쪽에 총구가 난 시신 4243구를 발견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독일은 소련에 의한 폴란드인 학살의 증거라고 주장했지만, 소련 측은 바로 "공사장에서 일하던 폴란드 포로들이 나치에게 붙잡혀 살해당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50년이 지난 1990년에야 미하일 고르바초프(Gorbachev) 당시 소련 대통령은 "카틴 사건에 소련군이 개입했다"고 잘못을 인정한다. 이후 공개된 당시 문서는 독일과 비밀협정을 맺고 1939년 폴란드로 쳐들어간 소련이 카틴 숲 근처 수용소에서 살해한 폴란드인 2만1768명의 명단을 포함하고 있다. 군인, 대학교수, 외교관, 공무원, 과학자, 작가, 정치인 등 폴란드의 엘리트들이 대부분이었다. 스탈린은 당시 "폴란드가 다시는 독립국을 만들지 못하도록, 폴란드 엘리트들을 모두 처형하라"고 명령한 것으로 전해진다. 레흐 바웬사(Walesa) 폴란드 전 대통령은 10일 뉴욕타임스에 카틴 숲의 학살이 "폴란드의 머리를 자른 사건"이었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현재 소련군의 개입을 인정하면서도 국가적으로 책임질 일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학살 후 70년이 흐른 지난 7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러시아 지도자 중 처음으로 학살 현장을 방문했지만, '다시 찾아온 카틴의 저주'로 빛이 바래게 됐다.



11일 모스크바의 한 가톨릭 성당에서 폴란드 비행기 추락 사고 희생자들의 추모 미사가 열렸다. 사망한 레흐 카 친스키 대통령 부부가 생전에 함께 웃고 있는 사진 앞에 촛불과 장미꽃들이 놓여 있다. / AP연합뉴스


70년 지나도 끝나지 않은 ‘카틴 숲의 악몽’


폴란드-러시아 갈등사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4월. 러시아 서부 스몰렌스크 인근 카틴 마을 숲에서 귀를 찢는 듯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 마을의 포로수용소에 잡혀 있던 폴란드인 4000여 명이 피를 흘리며 꼬꾸라졌다. 후에 ‘카틴 숲 학살’로 불린 사건의 현장이었다. 폴란드의 독립을 막기 위한 스탈린의 명령으로 카틴 숲을 포함해 여러 지역에서 약 2만 명의 폴란드 장교와 지식인 등이 총살됐다. 그로부터 70년 후 카틴 학살 추모 행사에 참석하러 가던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 부부와 추모단이 탄 비행기가 학살 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추락했다. 반러 성향 때문에 러시아 정부의 초대를 받지 못한 카친스키는 스스로 추도식 행사 참석을 강행하다 참변을 당했다. 그와 함께 96명의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러-폴란드의 악연을 상징하는 ‘카틴 숲’의 악몽이 재현된 듯했다.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족이면서도 반목과 갈등의 역사를 겪어왔다. 갈등의 씨앗은 10세기에 뿌려졌다. 966년 폴란드가 가톨릭을, 988년 러시아가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두 민족 간에 종교적·문화적 이질감이 뿌리를 내렸다. 이후 서로 다른 문화권을 대표하는 폴란드와 러시아의 패권 다툼이 시작됐다.

초기엔 폴란드가 유리했다. 리투아니아와 손잡고 연방국을 구성한 폴란드는 17세기 초 혼란에 빠진 러시아를 침략해 모스크바를 직접 통치하기도 했다. 하지만 승리는 짧았다. 17세기 중반 이후 쇠퇴의 길을 걷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의해 세 차례나 영토를 분할 당한 끝에 1795년 유럽 지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로부터 123년 동안 폴란드 영토의 상당 부분은 제정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1918년)과 함께 찾아온 독립도 오래가지 못했다. 1939년 2차 대전 발발과 함께 폴란드는 또다시 독일과 소련에 국토를 분할 당했다. 나치군이 폴란드 서부를 침공한 2주 뒤 소련군은 폴란드 동부 지역을 점령했다. 전쟁 직전 히틀러와 스탈린이 체결한 비밀협정(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결과였다. 폴란드는 “소련이 등에 칼을 꽂았다”며 분노했다. 카틴 숲 학살도 폴란드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소련은 50년이 지나도록 카틴 숲 학살을 나치군의 소행이라며 발뺌하다 1990년에야 책임을 인정했다.

2차 대전 후에도 소련은 폴란드에 친소 공산정권을 수립해 사실상의 지배를 이어갔다. 해방을 향한 폴란드의 꿈은 1991년 소련이 붕괴한 뒤에야 현실이 됐다. 하지만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양국의 악연은 풀리지 않았다. 독립국가를 수립한 폴란드는 친서방 정책으로 러시아에 맞섰다. 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했고, 2004년 유럽연합(EU) 회원국이 됐다. 폴란드 당국은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란 등의 위협을 명분으로 추진하던 동유럽 미사일 방어(MD) 기지를 자국 영토에 세우도록 허용하면서 크렘린과 대립했다. 폴란드가 러시아 연방에서 독립하려는 체첸 반군을 지원하고, 2008년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던 그루지야를 지원한 것도 양국 간 갈등의 골을 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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