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과학 산업

제주의 동굴 3 - 용천동굴 2

물곰탱이 2010. 3. 20. 00:08


제주의 동굴 3 - 용천동굴 2


용천동굴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흔적들이 대단히 많다는 것입니다. 숯, 나무토막, 다양한 동물뼈, 토기 깨진 것, 전복 껍질, 제단 비슷한 것, 쌓아 놓은 돌더미, 쇠막대, 벽면의 낙서(?) 등, 실로 다양합니다. 숯이나 동물뼈, 토기 등을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통일신라 시대를 전후하여 사람이 드나들면서 어떤 의식을 거행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과연 통일신라시대에는 어디로 사람들이 출입을 하였으며, 어떤 의식을 하였을까? 원래 만장굴, 김녕사굴, 용천동굴이 처음에 생길 때에는 하나로 이어져 있었는데, 중간 중간이 용암으로 막히거나 천장이 무너져 메워지면서 끊어진 것으로 판단합니다. 용천동굴 최상류와 김녕사굴 최하류의 입구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으며, 용천동굴 최상류는 사구층을 이루던 흰모래로 막혀있습니다. 물론 지표에는 모래층으로 덮혀 있어 용천동굴의 입구는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통일신라시대까지는 출입구가 있었는데 어떤 원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태풍, 폭풍?) 모래가 입구를 막아버려 더 이상 출입을 못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 또한 많은 토기 조각들, 동물뼈 등이 널려 있는데, 고고학자들의 의견으로는 부유층이나 지배계층이 의식을 거행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웃한 김녕사굴에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김녕사굴에 커다란 뱀이 살면서 심술을 부려 정기적으로 처녀를 바쳤다는 기록입니다. 그래서 뱀 사 蛇窟이라고 부릅니다. 지금도 김녕굴 입구에 가면 전설에 대한 안내판이 있습니다. 또한 제주도 박물관에 가면 김녕굴에서 의식을 거행하던 그림도 있습니다.

용천동굴을 조사하면서 특히, 호수를 조사하면서 가장 흥분되었던 것은 혹시라고 사람의 뼈가 나오지 않을까하는 기대였습니다. 만약 나이어린 처녀의 해골이라도 나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하루 속히 이러한 것들이 모두 밝혀지고, 모든 사람들이 사이버 공간을 통해서라도 동굴 내부를 샅샅이 들여다 볼 수 있기를 바랄뿐입니다.



 만장굴 입구 삼거리의 용천동굴 안내판. 안내판 뒤 첫번째 전신주 있는 곳이 용천동굴 출입구.
이 전신주를 옮기려다 용천동굴이 발견되었습니다.



 용천동굴 출입구. 이 전신주를 처음에 세울 때 조금만 더 팠으면 그때에 동굴이 발견되었을 것입니다.



 과거 사람들이 출입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용천동굴 최상류 부분, 모래 위를 딱딱한 석회질 침전물이

완전히 덮고 있습니다.



 사다리 밑은 깊은 물이고 사다리를 건너면 맑은 호수가 나타납니다. 옛날 사람들이 이 곳을 지나가기 위하여
나무로 통로를 만들어 놓았으며 그 나무들은 지금 썩은 채로 호수 밑에 수북히 쌓여 있는 것 같습니다.  



전문 다이버들이 호수 밑을 탐사하는 모습. 이 호수 속에는 동물뼈, 길다란 나무 더미, 각종 토기 등이 있습니다.



 이 문자의 뜻을 아시는 분은 꼭 댓글로 풀이를 해 주시기바랍니다.



 동굴 벽의 낙서(?)



 토기 조각. 당시에는 의식을 거행하고 나면 그릇을 깼다고 합니다.



탐라국 부유층이나 지배계급 사람들만이 사용했다는 토기. 문양이 아름답습니다. 경주 박물관에도 있답니다.



 



 의식을 지냈던 제단일까요?



호수를 약 150m 건너 작은 가지굴에는 멧돼지 뼈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입구에서 약 3km나 되는 여기까지 어떻게 왔을까요?
제물로 바친 것일까요? 분명히 살아서 온 것 같기는 합니다.  



 

 뼈들이 화석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연대측정을 해보면 800-900년 A.D.



전복껍질도 많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껍질의 구멍을 막아 술잔이나 그릇 대용으로도 사용했답니다.


글 / 사진 / 이광춘

http://cafe.daum.net/snua10/6ITb/463